1박 2일의 짧은 여행이었다. 그런데 떠나기 전부터 시작해 속초 여행을 하기까지, 계획만 대여섯 차례 조정하고 고민했다. 그저 바다가 보고 싶을 때나 회 한 접시 에 소주 한잔 떠오를 때 혹은 설악산의 웅장한 기백이 그리울 때면 언제고 훌쩍 다녀온 곳이었음에도 이번 여행은 유독 마음이 쓰였다. 한겨울의 변화무쌍한 날 씨 탓도 있었고, 새로운 명소가 여럿 생겨 욕심 많은 여행자 심보를 품은 이유도 있었다.
여행을 떠나기로 한 날도 하필 전국에 종일 비가 내린다는 예보가 있어 결국 하루를 미뤄 출발했다. 비 온 다음 날이어서 파란 물감을 풀어놓은 것처럼 하늘이 맑아 눈 호강을 했다. 설악산에 오르면 멀리 속초 시내와 바다까지 한눈 에 볼 수 있으리란 기대에 첫 목적지로 정했다.
인생 최고의 설경
설악산 입구부터 설렘이 커졌다. 전날 비 예보가 있어 미룬 일정인데 설악산은 뜻밖에 새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인 설경으로 맞아주었다. 곧장 설악산국립공 원 소공원에 위치한 케이블카를 타러 달려갔다. 설악 케이블카는 5~10분 간격 으로 해발 700m의 권금성까지 왕복 운행한다.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이나 날씨 가 좋지 않으면 종종 케이블카 운행이 중단되기도 하는데, 다행히 정상 운행 중 이었다.
케이블카를 타고 10분쯤 올랐을까. 창밖으로 펼쳐지는 외설악의 비경에 감탄사를 내뱉을 여유도 없이 어느새 승강장에 다다랐다. 승강장에서 권금성까 지는 그리 멀지 않은 길인데 눈길이 미끄러워 바짝 긴장한 채 천천히 걸어 올랐 다. 산책로는 눈이 녹아 있었지만 사방의 나무며 발길이 닿지 않은 길에는 소복 한 눈이 그대로여서 새하얀 겨울 왕국 같은 설악산을 마주했다.
고려시대 몽골 의 침입을 막고자 권 씨와 김 씨 두 장수가 하룻밤 만에 성을 쌓아 권금성으로 불리는 거대한 바위 아래는 무릎 높이까지 눈이 쌓여 걷기도 쉽지 않았다. 미끄 러져 엉덩방아도 여러 차례 찧었지만 아프거나 창피한 생각도 안 날 만큼 멋진 풍광에 이끌렸다. 마침내 권금성 아래 올라서니 외설악은 물론 멀리 속초 시내 와 파란 바다까지 파노라마로 펼쳐져 가슴이 뻥 뚫리는 듯 황홀한 기분이 들었 다. 들숨과 날숨을 의식해 길게 호흡하며 인생 최고의 설악산을 가슴 깊이 꾹꾹 새겨 넣었다. 한참을 그러고도 아쉬움이 남아 그 순간 생각나는 몇몇에게 사진 을 전송하고 메시지를 보냈다. 이렇게 멋진 곳에 꼭 한번 같이 오고 싶다고.
동해의 떠오르는 명소
속초에 다녀간 숱한 기억을 떠올려보면 속초해변과 대 포항이 대부분이다. 속초해변에서는 해수욕을 즐기거나 ‘바다멍’을 했고, 대포항에서는 가격 흥정을 하며 횟감 을 찾아다닌 추억이 있다. 20대 때의 일이니 시간이 한 참 흘렀고 지금의 속초는 젊은 감각이 더해졌다. 속초해 변에는 지난해부터 운행하기 시작한 속초아이대관람차 가 단숨에 동해의 랜드마크로 떠올랐고, 말끔하게 정비 한 대포항에는 회센터, 홍게 맛집, 튀김을 파는 분식 코 너 등이 구역을 나눠 여행자를 반긴다.
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해변에 위치한 속초아이대관 람차는 전국에서 발길을 불러 모으는 핫한 명물이다. 오픈 소식을 접했을 때부터 꼭 한번 타보고 싶어 미리 예매해두고 찾아왔다. 설악 케이블카와 마찬가지로 강 풍이나 우천 시에는 운행이 중단된다. 매일 오전 10시부 터 저녁 8시까지 운행하는 대관람차는 정원 6명이 탈 수 있는 관람차가 36대로, 최대 216명이 동시에 이용할 수 있는데 주말에는 줄이 제법 길다는 후기도 있다. 사방이 통유리로 된 관람차에 올라타 바다와 설악산을 넓 은 시선으로 바라보니 감동도 더 웅장해진다. 제일 꼭대 기인 아파트 22층 높이까지 올랐을 때는 아찔한 기운이 감돈다. 관람차가 한 바퀴 돌아가는 20여 분의 시간은 천천히 흐르는 듯하지만, 내릴 때가 되면 아쉬움이 남 을 만큼 짧게 느껴진다.
앙젤루스 소원테마파크 속초아이점은 대관람차 탑승 후 함께 체험해보면 좋을 공간이다. 소원을 테마로 우리 나라는 물론 동양과 서양의 행운을 상징하는 다양한 이 야기를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어 이색적이다. 흥미로운 전시물과 체험 거리가 가득하고 포토 스폿이 많아 이색 사진을 남기기도 좋다. 어린 시절 장난처럼 하던 놀이 아이템도 많은데, 자칫 유치하게 생각할 수 있는 전시물 이지만 절로 미소 지어지는 기분 좋은 공간이다. 어느새 근심과 걱정을 싹 비우고 새해 행운을 기원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.
제주와 강릉을 대표하는 문화공간으로 아르떼뮤지엄이 있다면, 속초에는 뮤지엄엑스가 있다. 지난해 8월 오픈 한 4층 규모의 신상 전시관에서는 가상현실(VR), 인공 지능(AI), 홀로그램, 게임 등 최신 기술을 오감으로 체 험할 수 있어 흥미롭다. 입구부터 화려한 빛의 패턴이 반복되는 거대한 만화경을 지나면 최첨단 놀이터가 펼 쳐진다.
몸의 움직임과 손짓대로 빛과 소리가 변하는 라 이팅 쇼, 뛰어오를 때마다 다채로운 영상을 보여주는 레 이저 트램펄린, 가상 공간을 날아오르는 듯한 경험을 선사하는 그네 등 빛과 소리, 영상, 음악, 향기의 모든 요소가 오롯이 나에게 맞춰 반응한다. AI와 채팅을 통 해 나를 위한 포토존을 만들어주고, 휴머노이드 로봇이 대화하며 초상화도 그려주니 그야말로 어디서도 경험하 지 못한 특별한 시간으로 기억에 남을 듯하다.
여전히 멋있는 낭만, 맛있는 속초
새해 속초 여행을 계획하면서 빠뜨릴 수 없는 일정은 해 돋이를 감상하는 것이다. 이번 여행길에도 ‘밝은 동해’라 는 이름의 동명항에서 일출을 보려고 근처에 숙소를 잡 았지만 아쉽게도 날이 맑지 않아 감동적인 아침을 열지 는 못했다. 동명항 인근에는 속초 등대와 영금정, 해맞 이 정자가 모여 있어 날씨만 허락한다면 속초의 명물 사 이에서 장엄하게 떠오르는 태양을 만날 수 있다.
속초 1 등대 밑자락에 자리한 영금정은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가 마치 거문고 소리처럼 영롱하다는 뜻에서 유래한 지명답게 시야가 탁 트 인 바다를 감상하기 좋다. 비록 아름다운 해돋이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지난밤 오색 조명을 밝힌 영금정 야경을 눈에 담아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. 아쉬운 마음에 바다 좀 더 가까이에서 산책이라도 할 마음으로 외옹치바다향기 로를 찾았다.
외옹치항과 외옹치해수욕장을 연결하는 총길이 890m의 산책길이 다. 원래 안보 철책선이 설치돼 민간인 출입을 제한하던 군사 시설이었는데, 출 입 통제 65년 만인 2018년 4월 개방해 비교적 때 묻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해안 풍경을 만날 수 있다. 기암괴석에 부서지는 파도 소리에 발맞춰 걷다 보니 매서 운 바닷바람도 괜스레 상쾌하게 느껴졌다.
30분 정도 걷다 보니 그제야 뜨끈한 국물 생각이 나서 속초관광수산시장으로 향했다. 시장 인근 식당에서 언젠가 한번 맛본 이후 내내 생각나던 감자옹심이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. 오랜만에 먹 어도 역시 옹심이의 쫀득한 식감과 고소한 국물 맛은 그대로다. 미각도 쉽게 잊 히지 않는 것인지 속초만 오면 생각나는 음식이 많다.
설악산에 오르기 전 필수 코스인 할머니순두부, 한겨울에도 군침 돌게 하는 새콤달콤한 오징어물회, 아바 이마을 오징어순대, 주머니 사정 생각해서 큰마음 먹고 한 번씩 먹는 대게와 홍게…. 겨우 1박 2일의 여정이었기에 끼니를 선택하는 것도 고심을 거듭했다. 더군 다나 신상 맛집도 줄줄이 문을 열었다는 소식에 마음속 경쟁이 더 치열했다. 홍 게살로 가득 채운 샌드위치, 에그타르트를 맛보려면 이제 마카오가 아닌 속초 여행을 해야 한다는 후기가 있을 정도로 핫한 디저트 가게, 주말에 하염없이 줄 을 서지 않으려면 오픈런이 필수라는 수제 아이스크림 가게도 있다. 마음 같아 선 1일 5식 정도는 하고 싶었지만, 다음 여정을 위해 참아보기로 했다.
대신 마음의 양식을 채우기 위해 속초 여행길에서 빠뜨리지 말아야 할 또 한 곳, 동아서점을 들렀다. 1956년 문을 열어 70년 가까운 세월을 3대가 이어 운영하는 서점 이다. 속초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으로 이 지역의 흥미로운 이야기가 깃들어 있 는 곳이다. 여기에서는 시간 체크를 잘해둬야 한다. 감각적인 큐레이션으로 진열 된 책을 구경하다 보면 두세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버리니 말이다.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사랑받는 속초의 수많은 명소와 요즘 새롭게 떠오르는 장소를 두루 만나고 경험한 여행길. 마음에 남긴 후기는 딱 두 문장이다. ‘역시 속초다.’ 그리고 ‘다시 속초다.’
설렘 가득한 속초 여행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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